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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마당

2026년 8월 통영(統營)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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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택(62)
9시간 55분전 62 1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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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統營) 기행

                                                                                                                                            의촌(懿忖)  임 순 택

 

올해 여름은 유별나게 40에 육박하는 폭염으로 전국이 가마솥 더위로 몸살을 앓았는데 지난 6월에 이어서 두 번째로 고교 동기 셋이서 필자를 경상남도 통영시 미수동 언덕배기 덕수사랑방 아지트(Azit)로의 초대를 거절하기 어려워서 8월 초하룻날 이른 새벽에 일산집을 나서서 동서울터미널 발 경북고속 첫 차 타고 주말 경부고속도로의 버스전용차로를 씽씽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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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경상남도 진주시까지만 개통이 되어 대진(대전-진주)고속도로라 불리던 편도 2차선 고속도로가 종착지 경남 통영까지 시원하게 완전히 개통되어서 대전 터널을 지나자마자 우틀하여 현재는 이름이 바뀐 대통(대전-통영)고속도로를 두 시간 넘게 달려 내려갔고 통영시 미륵산 밑자락 미수동(美修洞) 언덕배기 아파트 4층에서 오후 5시에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첫발을 내디딘 통영종합버스터미널 구내에 있는 유일한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코리아둘레길 4개 길 4,500중 두 번째로 긴 남파랑길 제29코스를 역방향으로 걷기 위해 북신해변공원으로 달려 갔다. 코스의 길이가 17.4에 달해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 다 걷기는 애시당초 무리라고 판단하여 코리아둘레길 두루누비 앱 인증의 기준인 필수경유지 일곱 군데 중 세 곳만 지나서 길멎음하기로 마음을 다잡고 평인일주로 노을전망대까지 걸었으며 두루누비 어플에서 소정의 코스 완주 인증을 확인하고 나머지는 택시를 호출해서 통영대교까지 서행하며 거제도 출신의 유한회사 통영택시 73세 기사님과 통영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주요 지점에서는 택시를 세워 통영 바다 풍경을 촬영할 수 있게 도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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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대교를 건너며 아치빔이 예사롭지 않아 물었더니 유명한 이곳 화가의 작품이라고 하며 밤이 되면 통영대교 전체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볼 만하다고 했다. 통영대교는 충무교와 함께 통영반도와 미륵도를 잇는 두 다리인데 통영대교 지근거리에 국내 유일의 해저터널이 있다고 해서 그 쪽으로 향했으며 통영시 미수동 - 당동 간 483 미터에 달하는 해저터널이 가설된 것은 놀랍게도 일제 때인 1932년이었다. 마침 필자가 수년 동안 지속하고 있는 국가유산청(전 문화재청)의 나만의 국가유산해설사 웹(Web)에도 포함되어 있는 통영의 국가등록문화유산(역사유적 유형으로 분류)이라서 국가유산 탐방도 겸한 셈이 되었다. 8월 초까지 전국적인 폭염 상태이지만 해저 10미터(만조 때는 13미터) 아래를 지나 걸어보니 석빙고에 들어온 것같이 시원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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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친구들과 다시 한 번 찾고자 다짐하며 고교 한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 미수동 현대파크맨션 402호로 걸어 올라가서 악수를 나누었는데 마침 고교 여자 후배가 도와주고 있다면서 이름을 이야기하는데 세상에나 만상에나 코로나 판데믹 훨씬 이전에 46회부터 101회 졸업생까지 1,200여 명이 활동하고 있는 DS ALL Daum Cafe에서 제가 2년 간 회장을 하며 익히 알고 지내던 후배를 그 자리에서 반가운 해후를 한 것이다. 그 여자 후배 부부는 25년 전부터 통영에서 어심(魚心)이라는 건어물상회를 경영하고 있었으며 제 장인어른 돌아가신 첫 날 경남 거창 장례식장까지 부부가 조문을 왔었으니 그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리고 고교 동문회 산하의 책사모(책을 사랑하는 모임) 회장일 때 서울에서의 오프라인 모임 때마다 통영산 석화()를 공수해 와 선.후배 동문들과 뒤풀이 회식 때 보따리를 풀고는 했으니 참으로 진국인 여자 후배였던 것. 아지트 내부 청소가 끝나고 5시에 만나기로 한 다른 두 명의 동기가 경북 의성에서의 콩쿨대회 결과까지 보고 오려면 밤 10시는 되어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우리 셋이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한 명은 성악하는 변호사 정 변인데 한국은행 입행동기이기도 해서 그날 경북 성주에서 콩쿨대회에 참여했던 것인데 오후 6시 입상 여부를 확인한 다음에 두 친구가 통영으로 밤운전하고 온댔으니 우리 셋이서 늘 가던 인근 횟집 두 군데를 들어가려고 했으나 이미 횟감이 다 떨어져서 식사조차 할 수 없다며 문전박대 받고 말았다. 할 수 없이 LG SSM(슈퍼 슈퍼마켓) 옆에 있는 정육 식당에 들어가 고기가 엄청 많이 들어 있는 국밥을 세 그릇 시켜서 함포고복하였고 여자 후배의 레이(Ray) 차량의 키를 남편이 갖고 있다고 해서 숙소로 오기로 하고 다시 4층으로 걸어 들어와 조금 후에 경북 성주에서 출발한 두 친구가 밤 10시 다 되어 도착했고 오랜만에 만난 고교 동기 넷이서 권커니 잣커니 술과 안주로 시간을 죽였다. 자정 다 되어 베란다로 나가 통영대교의 밤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일어나 통영 앞바다에 뜨는 해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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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인 82일에는 고교 동기들 4명이 완전체가 되어 꼭 가고 싶었던 통영시 소재 여러 곳을 다녀 보기로 했다. 맨 처음 방문지는 통영이 낳은 대문호 토지의 박경리 기념관이었다. 올해 4월에 내부시설을 고쳐 재개관했다는 박경리 기념관 벽에 적힌 박경리 작가의 말에 시선이 멈췄다.

제 삶이 평탄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삶이 문학보다 먼저지요. 중간중간 불행도 있고인생은 물결 같은 것이거든요.”

우리는 자연스럽게 박경리 묘소가 있는 박경리추모공원으로 향했다. 오전이지만 염천 무더위의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묘소까지 이어진 길은 가팔랐고, 계단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묘역은 사람 한 명 없이 조용했다. 묘 앞에는 바다와 산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숨을 골랐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통영 수산과학관이 있다고 해서 그리 향했다. 통영수산과학관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탁 트인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크고 작은 섬들이 잔잔한 수면 위에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통영 바다는 잔잔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전형적인 남해(南海)였다.

이어서 통영시 산양읍 산양일주도로를 달려 가는 길목에 이름이 제법 긴 카페가 있어 정 변호사의 에쿠우스(EQUUS) 차량을 갓길에 세워두고 계단을 올라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 이름은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

2층 미닫이 출입문 바닥에는 넘어져도 괜찮아,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서는 거야라 적혀 있었고 창가에 이미 진을 치고 앉은 남녀들 앞 통유리 너머에 통영 앞바다와 바로 앞 쑥섬이 손에 닿을 듯 펼쳐져 있었다.

우리가 앉은 긴 소파의자 오른쪽 벽에는 당겨 촬영한 달 사진 넉 장과 함께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 님의 시 전문이 세로로 인쇄되어 있었는데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열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다음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승전이 이어졌던 당포에 닿았다. 높은 곳 주차장 위에서 당포 만()을 바라보니 발 아래 통영수협당포위판장 건물과 그 뒤로 둥글게 각종 크고 작은 선박들이 정박해 있었다. 당포 오른쪽 언덕에는 성곽이 뚜렷이 남아 있었고 그곳으로 오르는 길목에 낯선 서양인의 기념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5년 전인 2021년 한국 - 포르투갈 수교 60주년되는 해에 마련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도래인 주앙 멘데스 기념조형물이었다. 기념 조형물 옆에 있는 설명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인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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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보다 23년 앞서, 하멜(표류기)보다 49년 앞서 조선 땅을 밟았던 사람

1604년 캄보디아에서 나가사키로 가던 일본 상선이 풍랑으로 통영 앞바다로 떠밀려 왔는데 7년 전쟁 임진왜란(1592~1598) 직후였기에 준전시상태였으니 투항하였으면 되었을 것을 굳이 덤벼들다 조선 수군에 의해 격침되고 말았다. 이 때 체포된 사람 중에 머나먼 포르투갈에서 온 상인이 있었으니 돈 주앙, 그 때 나이 34.

그는 삼도수군통제영(줄여서 통영’)에서 취조받고 한양으로 끌려가 또 취조받은 뒤 당시 명나라로 추방되어 제 나라 포르투갈로 돌아 갔었다. 그 만남을 기억하며 통영 당포항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돈 주앙의 조각이 세워진 것이며 또한 그의 고향 포르쿠갈 리스본 공원에 조선 여인의 조각이 세워졌다고 한다. 설명 안내판에는 최초의 서양 도래인이라 써놓았지만 최초라는 말은 어불성설인 듯. 이미 신라 때 서역 사람이 왕래하고 머무르며 결혼도 했었으니 말이다.

그 다음 목적지로 가기 전에 중화항 여객 터미널(중화항 욕지도/연화도 왕복 배편) 맞은편 정 변호사가 담배 한 곽 사기 위해 통영시 산양읍 당포리 548 소재의 CU 편의점 통영산양일주로점에 들렀는데 담배 구입 후 하는 말인 즉, 편의점 점장이 어찌나 잘 생겼는지 외국인 얼굴이라고 했다. 다시 같이 가서 확인도 할 겸 몇 마디 나누었더니 원래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살다가 부인의 건강 치료 차 이곳 통영시에 거주하고 있단다. 정 변호사의 말이 다소 과장되기는 했으나 타지에 와서 정착하고 있는 사람 같지 않게 참으로 사람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통영시 산양일주로 상의 마리나 펜션 전망대 앞에 정차해 놓고 전망대에 올라 확트인 통영 앞바다를 조망하였고 이어 달리자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기념관 앞에서 서행하며 아름다운 건물을 바라 보았다. 그 다음 통영반도와 미륵도를 잇는 통영대교 또는 충무교를 건너기 전에 통영시 산양읍 미륵도(彌勒島) 정상 아래까지 운행하고 있는 케이블 카 출발점도 차량을 탑승한 채 둘러 보았다.

통영에 첫걸음한 김에 통영 하면 떠 오르는 청마 유치환의 행복이란 시에 등장하는 통영여중 이영도 선생을 향한 연모의 편지를 5,000여 통 써서 부쳤다는 통영우체국도 보고 그의 묘역이 있는 거제도 탐방 그리고 국가유산의 하나인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통영 충렬사, 통영 세병관(洗兵館 - 여수 진남관과 비슷),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통영 우도 생달나무와 후박나무 등은 시간관계상 다음으로 미루고 어제 혼자 걸어 봤던 통영 해저터널을 통영시 당동 쪽 입구에서 친구들과 함께 진입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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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동 쪽이나 당동 쪽 양쪽 입구에 용문달양(龍門達陽)이라는 당시 일본인이 쓴 글씨가 양각되어 있는데 수중세계(水中世界)를 지나 육지(陸地)에 다다랐다.는 뜻이라고 한다. 통영에 덕수사랑방을 마련한 친구 얘기로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장군에 대패했던 왜군(倭軍)들이 수장(水葬)된 이 수역에 자신들의 조상들을 밟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1931~1932년 동양 최초로 해저터널을 가설했다고 한다.

통영 해저터널 중간쯤에 마련된 내부 벽면에 해저터널 역사 및 통영 관광 정보 전광판 등을 설치하였는데 그 내용을 일별하면 일제강점기 시기 건설된 통영시의 해저터널로 근대건축물이다. 19317월에 착공하여 193210월에 준공하였으며, 19961차 보수공사를 진행하였다. 통영시 당동에서 시작하여 미수동까지 이어져 있다. 동아시아 최초의 해저터널로, 2010년 거가대로의 가덕해저터널 개통 이전까지는 이곳이 한국의 유일한 해저터널이었다. 2005914일에 등록문화재 제201호로 지정되었다.

그 제원은 길이 483m, 높이 3.5m, 너비 7m, 평균 해수면 기준 깊이 10m의 해저터널로, 양측에 제방을 설치하여 물을 막고 직접 터파기한 후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가장 단순한 시공 방법인 개착식 흙막이 공법(가물막이 공법)으로 축조되었다.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317월 통영 운하가 90% 준공됨에 따라 해저도로 건설이 착수되었다. 통영읍에서는 당시 총독부에서 내세우던 실업구제책에 따라, 멀쩡한 건설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고 각지의 빈민 350여 명을 인부로 동원했다. 하루 10~12시간 노동에 일삯 25전이란 대우였는데, 임금 후려치기 및 의무 저축에서 비롯된 착취와 횡령, 조선인 인부와 일본인 감독 사이의 충돌 문제가 불거졌다. 임금으로는 도저히 생활비도 충당할 수 없던 빈민들은 타향에 일하러 와서 도리어 빚을 지는 신세가 되었다. 이 때문에 인부들은 아예 도망을 가기도 하고, 193110월에 강제 저금 폐지, 임금 금리 폐지, 대우 개선을 주장하며 총파업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당국의 강경 대응으로 별 소득 없이 업무에 복귀했다. 사건사고도 많았고 동양 최대 규모로서 '실험공사'란 우려를 사던 통영 운하 및 해저도로 공사는 193210월 어떻게든 멀쩡하게 준공되었다. 그 이후 운하 및 해저도로는 통영읍이 용남면 및 산양면 일부를 편입하는, 이른바 '대통영' 건설의 발판이 될 것으로 기대받았다.

광복 이후에도 사용되고 있었으나, 완공 이래 오랜 시간이 경과되어 바닷물이 스며드는 등 시설이 상당히 노후화되자 충무교를 가설하고 자전거를 제외한 차량의 통행을 금지하였다. 1967년에 해저터널 인근 착량교가 있던 위치에 운하교인 충무교(판데다리)가 완공되고 1998년에는 통영대교가 준공되면서 현재는 이들이 통영반도와 미륵도를 오가는 교통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후 미륵도 상수공급 목적으로 터널 양측에 상하수도관을 매설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하면서 터널의 폭이 당초 7m에서 5m로 좁아지게 되었다.

2005년에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로 등록문화재에 지정된 이래로 통영시에서는 해저터널을 관광시설로 개발하려는 갖은 시도를 했지만 교통용으로 건축된 밋밋한 콘크리트 구조물일 뿐이라 특색이 없고 관광 콘텐츠도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90여 년 전에 일제(日帝)에 의해 가설된 통영 해저터널 발자취를 살펴 보면서 다소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은 국력이 쇠잔해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민초들의 강퍅했던 삶 때문이었으리라.

비교적 짧은 12일 경남 통영 체류를 복기해 보는 지금은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다는 입추(立秋)가 지나고부터 아침 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폭염 때보다 평균 4~5낮은 기온 덕분에 한결 나은 컨디션으로 통영 나들이를 반추하며 충분한 시간을 내서 다시 또 통영에 내려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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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1

임순택(62)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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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택(62)
9시간 32분전
위 <통영 기행>은 季刊 《글의 세계》 2026년 가을호(통권 67호)에 게재됩니다.